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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

진짜 마녀 2025. 4. 21. 04:35

<음식디미방>, 음식으로 자극한 미(--)에 이르는 방법

 

 

장계향은 퇴계의 제자인 학봉선생의 문하에 들어 공부한 경당 장흥효 선생의 따님이다. 나중 스물일곱이 넘어 이복동생들을 얻기 전까지는 무남독녀로 자랐다. 어려서 초서를 잘 써 당시의 명필인 청풍자 선생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학발시>, <경신음>,<소소음>,<성인음> 같은 시를 남겼고, 포효하는 호랑이를 그린 <맹호도> 한 점도 남아 있지만 모두 열댓 살 이전이 것들이고 나이 들어서는 신기할 정도로 기록이 없다.

 

열아홉에 영해 나라골 이시명과 혼인했으며 슬하에 62녀의 자식을 둔다. 이시명이 전실 광산 김씨와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두었으므로 계향이 기른 자식은 모두 10남매였다.

아들들을 직접 천정 아버지 장흥효에게 데려가 교육시킨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시어른이 구존해 계시고 지아비가 살아 있었지만 이 하늘같은 어른들을 아랫동서에게 맡겨두고 계향은 친정인 춘파에서 3년이나 머문다. 이것은 홀로 된 아버지의 수발을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영해 같은 산골이 아니라 문향인 안동에서, 더구나 당시 최고의 학자인 아버지 경당에게서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한 의도가 더 컸던 것 같다.

 

계향의 시대는 조선 역사 중에서 특별히 암울했던 시대였다. 왜란이 막 끝나 참혹하게 파괴된 국토 위에 다시 두 번의 호란이 지나갔고 중국은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바뀌었다. 게다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이 발생한다.

미개한 오랑캐로 멸시하던 여진이 천하를 장악하고 왕이 그 앞에 고두배를 했으니 숭명을 대의로 여기던 계향의 남편 이시명 같은 남인 학자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받들어 지향할 가치체계가 허물이지는 정신적 공황 상태를 맞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시명은 오랑캐가 항복한 왕이 신하가 될 수 없어 깊은 산중으로 은둔한다. 계향과 아들들도 따라서 은둔한 삶을 산다.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먹던 수양산에 비한다 하여 원래 이름이 일월산 대신 수비산으로 고쳐 부르며 시명 가족은 수십 년을 일월산에서 머문다.

 

계향의 위대성은 평생에 걸친 실천에 있었다. 계향은 당대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했다. 기근이 참혹할 때 집 밖에 솥을 걸고 도토리죽을 쒀서 하루 수백 명에게 먹였고 굶주린 이들에게 적선을 할 때도 받는 사람이 마음이 상하지 않게 미리 똑같은 주머니를 만들어뒀다가 정성스럽게 일일이 양식을 담아가 건넸다. 받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얻어먹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귀한 대접을 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각성케 하려는 것이었다.

 

집안에서 부리는 종을 향한 마음씀에, 자손들을 교육하는 철학에, 지아비를 대하는 태도에, 일상 속 자신의 언행에, 특히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손길에 계향은 일관되게 지극한 경을 유지했다. 신분사회에서 신분에 얽매이지 않았고 벼슬이 지상목표였던 사회에서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자시들을 다만 성인(선비, 군자)이 되도록 훈육해서 학식이 높다는 말을 듣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선행을 했다는 말을 듣게 해다오라는 가치관을 몸소 눈으로 보여주며 가르쳤다.

 

육경의 주석이 하늘의 말씀이라면 곡식과 소채와 육고기와 물고기 안에 더 생생한 하늘의 말씀이 들어있다는 것을 계향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음식은 마음을 한곳에 모아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런 집중과 몰두를 반복하는 것이 바로 안방에서 딸들이 배우고 갖춰야 할 경이라는 것이 장계향 칠십 평생이 터득이었다. 사랑에서 남자들이 경전으로 성인 되는 길을 찾을 때 안방의 여인네들은 더욱 구체적인 방법으로 같은 곳을 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계향은 일러 주고 싶었고 그걸 디미방이란 이름을 빌려 딸들에게 은밀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수백 년 전 장계향의 요리책은 자연에다 인간의 정성을 플러스한 밥상의 힘을 말하고 있다. 수십 번 손이 가고 수십 시간 공력을 들인 음식은 가공하지 않은 천연상태의 열매와 날곡에 비해 훨씬 큰 에너지와 부가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그 에너지와 가치는 결코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주 안에 에너지 불명의 법칙과 똑같은 원리의 정성불면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들인 시간과 공력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사라지는게 아니라는 믿음이다.

정성과 공력을 들인 음식을 먹는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고 조리한 사람은 은연중 그윽한 세계로 실어가주는 나룻배가 된다.

한 땀씩 누벼가는 누비질이 면벽수행이다른 이름이라면 녹두에서 녹말을 얻는 지난한 작업 또한 딸자식에게 제 속 깊이 가라앉은 자비와 어짊을 길어 올리는 방편이 될 것이다. 겉보기엔 평이한 요리서에 불과하면서 실질은 성리학의 핵심을 은유와 진귀한 철학서임을 발견하게 된다.

 

 

 

<안동 장씨, 400년 명가를 만들다>, 김서령 지음, 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