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정부는 이승만 독재가 키운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처럼 미국에서 유학하여 영어도 능숙했지만 성격은 이승만과 달리 부드러웠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한 이름은 타마오카 츠토무였다. 일제시대 당시 친일경력의 카톨릭 단체 이사직을 맡았기 때문에 2009년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에 카톨릭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어 있다. 그가 이사직을 맡고 있던 단체는 매월 첫째 주를 애국주말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냈으며 미사 후에는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하도록 신자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외교관으로 초대 주미대사를 지냈으며 대한민국 정부의 조속한 승인을 이루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유엔군의 신속한 개입을 이끌어 내는데 기여하였다.
세련되고 전형적인 신사라는 평가가 많으나 정치적으로는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사라는 평가는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이기도 하였다. 그는 카톨릭 국가를 만드는 게 소원이어서 정치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같은 기독교 국가를 꿈꾸었고, 장면은 카톨릭 국가를 꿈꾸었다는 종교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이 있는 나라에서
참 아이러니한 지도자들을 만난 셈이다.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유엔대사와 국무총리를 맡으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적절하게 활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승만 정부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비록 이승만 장기 집권에 항의해 반대세력에 합류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서기도 했으나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의지 말고는 뚜렷한 비전이 없었으며, 집권한 뒤 맹목적 친미노선을 보일 뿐 남북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더욱이 민주당 신구파 갈등의 과정에서 내부 수습에 역량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윤보선과의 갈등으로 민주당 구파가 아예 탈당을 하고 신민당이라는 새로운 당을 창당하였다. 집권층 내부의 분열을 일으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자신의 지지기반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 되는 배경을 마련하게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도 수습을 위해 지도자적인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나약한 모습을 보여 지도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장면 총리는 일가족을 주한미군대사관에 데리고 가 피신을 하려 하였으나 주미대사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면 총리는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가르멜 봉쇄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당시 사태를 수습해야 할 지도자가 38시간 동안 가르멜 봉쇄수녀원에 있었던 것이다. 장면의 수행원 중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장면을 찾았지만 당일 장면을 차에 태우고 도망쳤던 운전수를 만났으나 그 사람은 끝까지 장면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잡아떼는 바람에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5월 18일 대통령 윤보선이 군사 쿠데타를 인정하자, 수녀원에서 나와 내각총사퇴 의사를 발표하였다.
후일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대학생 정대철이 왜 봉쇄수도원에서 나오지 않았냐고 질문하니,'박정희 뒤에 최경록 박사와 자네 부친 정일형 박사기 있었던 걸 알았네. 그래서 무척 당황했고 나가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도 들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반쿠데타 세력이 배후 인물로 지목하여 군사재판에 회부해 3번이나 징역 선고를 받고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1966년 간염으로 사망한 이후 포천에 있는 카톨릭 공원묘지에 묻혔다.
장면에 대한 평가는 이승만의 최대 협력자, 남한에 대한 국제적인 승인과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의 파명을 이끌어 내어 자유주의를 지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 검소하고 온화하였지만, 나약하고 의타적인 사람이었다는 평가 등 상반된 견해들이 많다.
그는 종교적으로 매우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는데, 장면의 영향으로 민주당 인사들은 세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장면과의 인연으로 인해 영세를 받았고, 김대중 대통령의 대부 역할을 하였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동성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장면은 일본인 장학관이 방문하여 발표를 할 당시 학생 김수환은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라는 발표를 하여 학교를 발칵 뒤집었다고 한다. 이때 장면 교장은 김수환 학생을 불러 체벌을 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그 행동이 "선생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 일본인 선생들 앞에서 오버를 하신 것"이라고 하며 친일파 명단에 오른 것을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후에 일본 유학 장학생을 선발할 때 김수환을 1등으로 추천하여 유학을 보냈는데, 사람을 아끼는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는 태평양 전쟁 말기 우리 나라를 국민총동원체체로 끌고 가면서 여러 단체를 만들어 각 단체의 기존 책임자를 대표로 내세웠다. 그때 장면박사는 대표적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단순히 이를 두고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가벼운 일이다'라고 하며 친일행각에 반박하였다.